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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의 '황혼'(황혼의 해설과 작가세계)

by 휴리스틱31 2021.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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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의 '황혼'(황혼의 해설과 작가세계)

 

서평

 

 

황혼에 관하여

 

193625일부터 1028일까지 <<조선일보>>에 발표한 한설야의 장편소설. 그때까지 발표한 단편소설에서 다루었던 세계를 통일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한단계 정리한 한설야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순, 준식, 경재이다. 여순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토착 자본가인 김재당 집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서울의 모여고 졸업반 학생이다. 그녀는 김재당의 집 아들 경재와 가까워지게 되어, 그의 소개로 신흥 자본가인 안중서의 개인비서로 취직한다. 경재는 와세다대학 정치과 출신으로 한때 급진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무위도식하는 인물이다. 여순은 경재를 통한 신분상승을 꿈꾸기도 하지만 김재당, 안중서의 압력과 경재의 약혼자 안현옥의 방해, 안중서의 겁탈 기도 등을 계기로 불투명하고 지지부진한 상황에 염증을 느껴, 결국 노동자로 변신한다. 여순의 이러한 전신(轉身)을 촉발하는 사람이 동향 친구 준식으로, 그는 서울에서 고보를 다니다가 사상사건에 연루되어 제적된 후 소유자로 현재는 의식화된 노동자로 변신한 인물이다. 안중서는 여순을 이용하여 노동자의 동태를 감시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감원을 위해 실시하려던 건강진단 문제로 오히려 노동자들과 대립하게 된다. 경재는 공장에서 항의 차 사장실로 들어오는 준식, 여순 등과 마주치면서 어두워가는 황혼에 선 자신을 발견한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경재와 여순, 혹은 경재와 준식을 대조적인 수법으로 다루면서 여순의 노동자화 과정을 작품의 중심에 놓고 있다. 이 노동자화가 역사의 발전에 합치되는 과정이면서 여순의 자연스러운 변모과정임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신흥자본가와 토착자본가, 건강한 노동자와 타락한 노동자, 개량적 운동세력과 혁명적 운동세력 등 여러 유형의 인물들을 주변에 배치해놓고 있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와 함께 우리 근대 노동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갈래 : 장편소설.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1930년대 중엽, 일제 식민치하의 방직 공장.

주제 : 현실의 모순 구조에 대한 계급적 인식.

려순 -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고학으로 여학교를 졸업한 여성. 회사 사장 비서로 근무하다가 다시 노동자로 변신, 노동 문제에 가담한다.

안중서 - 방직 공장 사장. 식민지 예속 자본가로서 부정적 인물.

준식 -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동의 대변자.

 

<황혼>은 한설야의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몰락한 농민의 반항을 주제로 했던 <신경향파> 소설의 단계에서부터 농민의 몰락과 그들이 노동자로 전락해 가는 계급 문학의 초기 단계를 벗어난 작품 성향을 지닌다. , 계급 문학의 방향 전환을 이념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한설야의 의식이 작품화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저항에 단순성·계급적 투쟁성을 벗어나, 그들의 힘을 조직화하는 노동 운동으로 전환하는 데까지 이 소설은 나아가고 있다.

 

특히, 지식 계급에 속하는 주인공 '려순'이 스스로 자신의 소시민적·개인주의적 의식을 청산하고 노동자로서의 자기 변신을 꾀함으로써 창조적인 삶으로의 노동에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소설의 이념적 성과로 지적할 수 있다.

 

한설야론 - 권영민교수

 

이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 1930년 중반의 식민지 현실은 철저한 계급적 대립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황혼>의 전반부는 방직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자본가 계층의 생활과 의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후반부는 방직 공장의 노동자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가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상반된 두 가지 내용의 연결은 여주인공 '려순'의 삶의 과정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려순'의 사회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려순'은 시골 태생으로 서울에 올라와 고학으로 학업을 계속했고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여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방직 공장 사장의 비서로 취직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장의 탐욕에 대한 반감을 갖고 회사를 뛰쳐나온 후, 다시 노동자의 신분으로 공장 직공이 되어 공장 내에서 일게 되는 노동 운동에 관여한다.

 

주인공 '려순'의 이같은 삶의 행적 가운데 방직 공장 사장의 비서로 일하게 되기까지가 이 소설의 전반부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녀가 비서직을 버리고 회사를 뛰쳐나온 후 다시 여직공으로 신분을 바꿔 공장 작업 현장에 뛰어드는 내용으로 후반부가 이루어져 있다.

 

<황혼>의 전반부에서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지배 논리에 순응하면서 자신들의 삶의 안위를 도모하고 있는 자본가 계층의 부도덕한 삶과 그 형태이다. '려순'이 가정 교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재당의 일가들은 자신들이 누려 온 부와 사회적 지위를 고수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사업에 손해를 입은 김재당은 돈 많은 안중서를 끌어들여 방직 공장을 경영하게 하고 안중서의 딸과 자신의 아들 김경재의 결혼을 서두른다.

 

안중서는 방직 공장을 경영하면서 생산력 증강과 산업 합리화 방안을 내세워 직공들을 휘어 잡고 그들을 마음대로 조정하고자 한다. 이같은 자본가 계층의 생활 태도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결여, 자기 삶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태도,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물질주의적 의식과 도덕의 타락 등으로 그 특징을 규정지을 수 있다.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에서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생활이 중심을 이루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열악한 노동 조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기 위한 노동자들의 의욕이 두드러지게 묘사되어 있다. 이들 노동자들은 모두 농촌 출신들로서 농촌에 대한 일제의 착취에 견디지 못한 채 농촌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시 공장에서도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불공평한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진 노동 조건과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실적 모순이 계급적 구조로부터 기인하는 것임을 점차 알아차리게 된다. 따라서 공장 노동자들은 상호 연대성을 확립하고 힘을 합치면서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가 계층에 저항하게 된다. 그 저항은 점차 조직적인 노동 운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황혼>은 당대 현실의 모순 구조에 대한 계급적인 인식에 근거하여 자본가 계층의 삶과 노동자 계층의 삶을 대조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대조적인 현실의 제시는 소설 기법면에서 도식적인 이분법의 논리에 따르고 있는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작가 한설야가 판단하고 있었던 자본가 계층의 타락과 노동자 계층의 성장이라는 계급적 도식이 실제적으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역사적 전망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일제의 확대 과정에서 민족 자본의 예속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노동 계급의 성장 문제는 식민지 지배 체제 내에서의 체제 모순의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같은 모순 구조의 해결이 식민지 체제 극복으로 이어져야만 그 역사적 의미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황혼>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연결이 주제의 통일성을 가져 오는데 있어서는 실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의 생활과 그 조직화 과정이 전반부의 통속적인 삽화로 자리잡고 있을 뿐, 후반부에까지 논리적인 발전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소설적 상황과 국면의 대조적인 제시를 통해서 계급적 대립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작가의 노력은 인정할 만하다 하겠다.

 

작가 한설야에 대하여

 

함남 함흥 출생. 본명 한병도(韓秉道).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도쿄[東京]에 있는 니혼[日本]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북창(北倉)사립중학교원을 거쳐, 1925조선문단에 소설 그 날 밤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해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창설에 참가한 맹원이었고, 1927년 이후 프롤레타리아 예술선언》 《프롤레타리아 작가의 입장에서》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등의 평론을 발표한 강경파 좌익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91946년에 청춘기》 《귀향(歸鄕)》 《황혼》 《한설야단편선》 《초향(草鄕)》 《()》 《이녕(?)10여 권의 소설집을 냈다. 초기 작품에는 주로 만주·간도 등지에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고통의 현실을 그렸기 때문에, 그 주된 무대가 농촌이었고 계급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적 색채가 중심을 이룬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감하여, 무력해진 프로문학의 전통을 살려보려는 의욕이 담긴 장편 황혼(1936)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유행하는 지식인의 불안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성장하는 노동계급의 삶의 현장을 취급한 그의 대표작이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전향자의 좌절과 현실타협의 논리가 작품상에 대두함으로써 그의 현실변혁 의식이 점차 퇴색하기 시작했음을 엿볼 수 있다.

 

1940년부터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한 장편 이 한말 전환기의 전체상을 다룬 중량감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정신의 형상화에 미흡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 조선문학건설본부의 노선에 반발하여 이기영(李箕永송영(宋影)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결성하였고, 이후 조선공산당의 지령에 의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자, 월북하여 초기 북한문단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북조선문학총동맹 중앙위원장이 된 후 인민위원회 교육국장, 북로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문화부장을 거쳐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위원직도 맡았다.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을 지냈으나, 방탕과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1962년 말에 숙청된 뒤 생사불명이다.

 

 

한설야의 작품 세계

 

냉전시대 한설야 문학의 민족의식과 비타협성

 

1.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한설야 읽기

 

그 때는 민족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고 심하면 그 말을 계급이나 그 투쟁을 반대하는 말로 치려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판을 치는 때였다. 그래서 나라도 민족도 떠나서 그저 혁명을 부르짖었고 막스 레닌을 부르짖어야 진정한 주의자인 줄로 알았다.1)

 

한설야가 1957년에 쓴 단편 레닌의 초상의 한 대목이다. 일제하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계급환원주의가 빚어냈던 추상적 현실인식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 부분은 민족의식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간접적이나마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민족이란 말은 곧 민족주의를 의미하였고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어긋나는 부르조아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맹목이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조선적 특수성을 거론하는 정도였는데 그나마 당시에 유행하였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문제점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였던 논자들 정도가 이것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하였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예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이런 태도로 임하였기에 식민지 현실을 극복함에 있어 제한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후에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전의 계급환원주의가 가져다준 폐해를 일정하게 깨달은 논자들은 계급의 담론 못지 않게 민족이란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현실을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이에 바탕을 둔 이론의 개척에 힘을 쏟았는데 그 객관적 성취 여부와 관계없이 이러한 태도 전환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이 무렵에 민족문학이란 말이 남북을 가릴 것 없이 과거 카프문학에 몸담았던 문학가들 내부에서 거부감없이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와 다른 민족의식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해방후 변화양상은 한설야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는 일제하 카프활동을 하면서 계급문제에 많은 비중을 두면서 세상을 보고 관찰하였다. 계급이란 프리즘을 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전부 반동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의 인용문에서 비판받고 있는 대상은 부분적으로 과거 일제하 한설야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프 대열 내에서 한설야는 상대적으로 민족적 특수성에 대해서 인식하려고 노력하는 편에 속했다. 설령 계급적 틀 속에서 현실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외국의 경험을 일방적으로 우리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졌고 구체성 확보에 주력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카프내 방향전환 논의가 벌어졌을 때 카프의 조건부 가입을 지지하였던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며 그 이후 일련의 작품과 평론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조선적 특수성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의 정도였지 그 이상으로 민족문제에 대한 확고한 자각을 갖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조선적 특수성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본격적으로 민족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가 아닌가 생각한다. 계급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려고 하는 계급환원주의적 사고에 대해서 차츰 의문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당시 코민테른의 7차대회의 방침과 이에 따른 이후의 변화도 일정하게 작용하였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구체적 천착에 더 많이 연유하였다. 특히 카프 2차 검거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면서 만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이후 함흥에 내려가 살면서 직접 간접으로 접한 만주에서의 항일운동 등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관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게끔 하였다.2)

 

특히 일제말에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더욱 이러한 인식이 강해졌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1943년의 투옥 경험이다. 한설야는 그 지역에 내려와 외국의 소식 즉 미국과의 싸움에서 일본이 지고 있고 곧 우리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과 그 이후 우리 민족이 해야 할 일 등을 전해 주면서 의논하였던 문석준에 연루되어 세 번째 옥살이를 하게 된다.3) 19437월에 투옥되어 그 이듬해인 1944년 봄에 풀려나기는 하였지만 이 사건 역시 그로 하여금 일제에 대한 인식과 우리 민족의 삶의 현실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미명하에 이루어졌던 계급환원주의에서 벗어나 민족적인 것과 계급적인 것의 상호관계를 성찰하게 되는 이러한 과정은 또다른 위험의 소지를 안게 된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민족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열정이 이제 민족주의로 치닫게 된다. 그렇게 될 때 민족적인 것을 특화시키면서 계급적인 것을 비롯하여 여타의 억압들과의 관련성을 상실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오히려 다른 것을 억압하는 형국이 벌어진다. 이것은 식민주의의 진정한 극복과는 거리가 먼 궁극적으로는 서구의 식민주의를 거꾸로 흉내내는 결과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주의의 진정한 극복이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매달려 자신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 천착을 결여하면서 민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결여하는 태도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스스로 그것의 포로로 되어버려 억압적 민족주의로 빠지는 것 태도 모두를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비서구의 지식인들이 감당해내야 하는 몫이며 또한 이럴 때만이 식민주의의 진정한 극복이란 세계사적 과제에 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해방후 한설야의 문학적 도정은 일제하 그의 활동과 더불어 매우 문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해방후부터 그가 숙청된 1962년까지(숙청된 이후 1976년 사망할 때까지는 전혀 활동을 하지 않는다.)를 그의 문학활동을 중심으로 이러한 식민주의 극복의 행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계급환원주의의 비판과 민족문제의 새로운 인식(1945-1948)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이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이전의 카프활동 시기에 보여 주었던 계급환원주의의 도식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하던 해방 직후 북한에서의 그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방향은 크게 세가지의 축으로 나아갔다. 첫째는 억압된 역사로서의 만주에서의 항일혁명운동을 복원하는 것이며 둘째는 소련에 대한 새로운 관계설정으로서의 국제적 연대의 모색이며 셋째는 통일독립과 분단의 문제이다.

 

이 시기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단연 억압된 역사의 복원을 통한 민족문제의 재인식이었다. 한설야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에서 전개되었던 민족해방운동을 직 간접으로 접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에 대해 풍문을 통해서나마 알게 되었다. 해방후에 이들이 삼팔선 이북 지역으로 들어오게되자 그동안 일제의 검열 속에서 일반 민중들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들의 실체와 행적을 글을 통해 알리는 작업이 작가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가 이 시기에 만주에서의 항일혁명운동을 다루는 작품을 썼을 뿐만 아니라, 직접 만주 지역을 답사하고 이에 기초하여 1000매에 가까운 기록을 남긴 것은 작가로서의 자신의 소임에 대한 이러한 자각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만주에서의 항일혁명활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취급한 것은 민족문제에 대한 한설야 자신의 재인식을 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계급문제만으로 보지 않고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통일적으로 보려고 하였던 그의 이러한 자각은 과거의 운동 중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에 가장 가깝다고 그 자신이 간주하였던 만주에서의 항일혁명운동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인 혈로,개선, “영웅 김일성 장군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단편 혈로(1946.1)1936년 무렵 김일성 부대가 향후 본격적인 국내 진공을 준비하면서 압록강 부근에서 행군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주목을 끄는 것은 애국심을 통한 민족문제의 강조이다. 만주 항일유격대가 일본군과 직접 싸우는 장면을 그리기 보다는 그 험난한 조건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내적 동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물론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장군이 철저한 전략과 전술에 입각하여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도 일정한 양을 할애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막강한 일본군대와 싸우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할 수 있었던 그 동력으로서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이다. 한설야는 일제하부터 인간의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다른 특장을 보여주었던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외부적인 전투의 장면보다는 내면적 심리를 주로 그렸으며 그 과정에서 민족의식의 표나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당시 북한 내에서는 만주에서 이루어졌던 항일운동이 그렇게 널리 퍼져 있지는 못하였다. 물론 소련에서 나온 김일성 부대가 북한의 지도부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차츰 이들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일제하에서의 철저한 통제로 인하여 몇몇 제한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던 것이 당시 형편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만주 항일빨치산에 대한 극히 제한된 정보는 항일운동과 변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일부 지식인들에게나 읽혔지 일반 사람들은 무관심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공비비적으로 불리워지고 선전되었기 때문에 국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4)그런 점에서 이들이 만주의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떻게 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고 바로 작가 한설야는 이 일을 혈로를 통해서 했던 것이다. 김일성의 평양 개선을 다루고 있는 개선(1948.3) 역시 혈로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작품이다.

 

억압된 역사의 복원을 위해 이 시기에 그가 행한 일 중에 특이한 것은 만주 답사와 이에 기초하여 김일성의 전적지 답사기를 썼다는 점이다. 19469월에 떠나 중국 내전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을 두루 거쳐 이루어진 이 전적지 답사에서 그는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전기가 거의 1000매 분량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북한 내에서는 출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5) 하지만 이 원고는 삼팔선 이남으로 넘어와 1947년 부산의 신생사에서 󰡔영웅 김일성 장군󰡕의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출판 서문을 보면 발행자가 저자인 한설야의 허락 없이 그냥 출판한다고 밝혀져만 있는데 왜 북한에서 이 원고가 출판되지 못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필자는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추측컨대 당시 북한의 당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원고의 출판이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을 우려한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제로 한설야의 이 전기는 이후 북한에서 나오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 상대적으로 실제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일제하 투쟁에 대한 한설야의 입장은 너무나 분명하다. 정치적 운동에서는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벌인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 그 최고의 것이고 문화적 운동에서는 카프가 그 최고의 것이라는 인식이다. 카프와 만주항일운동을 일제하 투쟁사 전체 차원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이후 혁명전통 논의가 벌어질 때 그 자신 당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핵심적 사안이 되기도 한다.6)

 

억압된 역사의 복원과 더불어 한설야의 새로운 민족인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은 소련에 대한 새로운 관계정립이다. 과거의 계급환원주의에서 벗어나 민족문제를 새롭게 인식한 한설야는 민족문학과 문화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카프 시기의 계급문학인 프로문학에 가두어져 있을 때와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더 이상 프로문학이나 프로문화가 아니고 바로 민족문화와 민족문학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민족문학의 독자성을 주장하면서 국수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갔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그가 이전에 결여하였던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고하게 갖게 되면서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통일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는 것과 민족문제에 모든 것을 환원시키려는 민족주의적 태도는 명백하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카프 시기에 가졌던 사대적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국제주의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문화를 비롯한 제반 외국문화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이것은 그가 민족문학을 내세웠지만 결코 민족주의에 빠져든 것이 아님을 잘 말해준다. 소련문화와의 교류를 주장하면서도 전근대 시대 중국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같은 것을 되풀이 하여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이 시기에 들어 변모된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그가 소련문화야 말로 민족문화를 가장 존중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다음의 우회적 지적에서도 드러난다.

 

우리가 소련문화의 섭취를 주장하는 이유의 또 하나는 그들의 문화야말로 진정한 민족문화의 옹호자라는 점에 있다. 그 문화는 그 어는 다른 나라보다도 각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인정하며 그것들이 바른 길로 발전하도록 방조하는 동시 또한 각 민족 문화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모든 인민들의 모범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소련 인민들은 자기의 문화를 세계에 개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각 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체의 영양을 삼을 것을 또한 잊지 않는 것이다.

 

실제 소련의 당시 문화가 한설야의 위의 주장처럼 다른 민족문화에 대해 열려있고 강요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지만 한설야 스스로가 당시 소련문화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국제적 교류와 연대 즉 자신의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상태에서 가능한 새로운 국제주의를 기획하려고 하였다.

 

이 점은 이 시기 그가 쓴 소설 모자와 이로 인하여 벌어진 소군정과의 마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은 소련의 일방적인 해방의 의의를 강조하는 이후의 작품(얼굴남매)과 달리 친선과 연대를 주제를 하였다는 점이 작품의 구성에서 금방 드러난다.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아내와 자식을 잃고 지금은 먼 나라인 북한에 들어와 있는 소련 병사가 어느 날 모자를 사달라고 조르는 딸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고민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기의 딸이 자신에게 모자를 사달라고 부탁하던 것을 회상하게 되자 분을 참지 못하고 가게에서 모자를 빼앗아 그 아이에게 준다. 자기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독일 파시스트와 싸운 것이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맞서 싸우다가 해방을 얻게된 조선 사람들의 투쟁이나 결국 반파시즘이란 차원에서 같은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소련의 진주가 단순한 해방자의 그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반파시즘의 연대라는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련군 병사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미화하기 보다는(1948년 이후에 나온 얼굴남매가 그러하다) 당시의 현실에 충실하게 그리려고 노력하였다. 소련군들이 북한에 들어왔을 때 일부의 병사들이 행한 잘못으로 인하여 주민들이 겁을 먹고 있는 대목이라든가 주인공이 모자를 사지 않고 가게주인으로부터 빼앗아 버리는 설정 등이 그러하다. 특히 승무 관람장에서의 총기 난동은 그 대표적인 대목이다. 승무를 보면서 승무의 구성이 처음에는 종교적 분위기로 시작하였다고 중반에는 인간적인 것의 승리로 급전하다가 종국에는 다시 종교적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인간적인 것의 승리를 거부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것을 지키기 위하여 파시스트와 싸운 자신들의 투쟁을 무화시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갑자기 박차고 나와 총기를 난사하려고 하는 정신분열적 현상에 대한 묘사가 그러하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이 무렵의 한설야가 새로운 국제주의를 모색하면서 과거 소련에 가졌던 그러한 일방적인 경사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들로 하여 이 작품은 당시 소군정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게 되었고 이후 이 작품을 개작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모자와 더불어 소련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소련 여행기이다.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교육국장으로 있던 그는 소련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들의 처지를 살피고 소련 정부와의 유학생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소련을 방문하였는데 이 여행을 토대로 쓴 것이 바로 소련 여행기이다. 당시 북한의 문학가들은 소련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고 갔다 온 사람들은 여행기를 남겼다. 이기영과 이태준의 여행기가 그러한 것들인데 한설야의 이 여행기는 두 사람의 그것과 일정한 차이를 갖고 있다.8) 그것은 그가 소련을 여행하면서도 선진 소련에 경탄하면서도 소련과 다른 조선의 특수성을 발견하려고 하고 이에 대해 의미를 두려고 하는 태도이다. 소련을 비롯한 외국과의 교류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이것이 이전처럼 사대주의적 추수가 아닌 연대의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노력을 제외시키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설야의 소련인식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맹목적 사대주의적 국제주의라기보다는 교류와 연대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제주의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억압된 역사의 복원이나 소련에 대한 새로운 관계 설정에 있어 이전과는 현저히 다른 민족의식의 태도를 보여준 한설야가 유독 분단과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그 주관적 강조에도 불구하고 평양중심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여 진정한 민족의식의 구현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우리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분단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나름의 노력을 펼쳤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문학가 조직의 전국적 범위의 통일을 위한 노력이다. 해방된 후 서울에서 임화를 비롯한 몇몇 문학가들이 조선문화건설협의회라는 것을 급조했을 때 거기에는 카프의 중추라 할 수 있는 한설야나 이기영 등이 빠져 있었다. 한설야는 19445월 신병으로 가석방되었지만 몇번에 걸친 옥중생활로 말미암아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고 또한 그가 일제말 고향인 함흥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서울에 올라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기영은 일제말에 강원도 금강산 밑으로 소개를 했기 때문에 그 역시 해방후 그곳에서의 인민위원회 일을 하였기에 쉽게 서울에 올라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처럼 카프의 중추가 빠진 상태에서 임화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이 문학가조직을 급조하였기 때문에 문제점이 노정되자 이러한 조직방식에 문제제기한 일부 카프계 작가들이 9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란 단체를 만들어 두 단체가 대립하는 형국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열이 좋지 않은 뿐만 아니라 또한 삼팔선 이북에 거주하는 작가들이 빠져 있기 때문에 이들을 전국적 범위에서 묶을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가 판단한 한설야는 직접 서울에 내려오기도 하였다. 당시 평양에서는 여러 사회단체들이 조직되어 당의 외곽단체로 편성될 무렵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이러한 위상에 걸맞는 문학가조직의 결성을 요구하였으나 한설야를 비롯한 문학가들은 이것이 문학가들의 분열을 더욱 야기시키고 나아가 분단을 초래하는 데 기여할 지 모른다는 판단 하에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62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조선공산당북부조선분국에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당의 외곽단체로서의 문학가 단체를 조직하라는 강압적인 지시를 내리는데 이것을 그는 받아들인다. 게다가 서울에서 약속하였던 전국적 범위의 문학가조직도 원래의 계획대로 되지 않게 되자 한설야는 이전의 방침을 포기하고 이제 민주기지론을 통일의 방법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기초하여 평양중심주의를 제창하게 된다.9) 이것은 결국 분단을 초래하는 것으로 이후 한설야의 통일인식의 핵심적인 사안으로 고정화된다. 이 시기 한설야의 평양중심주의는 분단 위기 하의 남북 현실을 다룬 작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작품에는 드러나지 않고 문단 활동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작품 자체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3. 냉전체제와 민족의식의 굴절(1948-1953)

 

일제하 한국 사회주의자들이 가졌던 계급환원주의적 사고로부터 벗어나 우리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노력은 냉전체제의 확산과 더불어 일정하게 왜곡되어 갔다. 미국과 소련이란 냉전 강대국을 양 축으로 형성되는 세계질서가 우리 민족의 분열을 촉진하고 나아가 분단을 고착시킬지 모른다는 판단을 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북한의 지식인들 대부분은 이러한 관점에 서지 못하고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회체제의 건설에 일차적인 중점을 두고 이 연장선에서 우리 민족의 통일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설야 역시 이러한 전반적 분위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특히 이전에 가졌던 평양중심주의로 인하여 이러한 정세인식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보았던 것처럼 과거의 계급환원주의와 소련에 대한 일방적 추수관계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해왔기에 체제적 대립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민족적 측면에서 고찰하는 시각을 놓치지는 않고 있다. 한반도에서 미국과 맞서 싸우는 일이 곧바로 민족적 자율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는 세계적 차원의 냉전체제에서 자본주의의 미국을 극복하는 일에 통하는 세계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냉전체제의 가장 민감한 지역이었던 한반도에서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민족적 과제이자 곧바로 세계사적 과제라고 간주하였다. 이 점에서 한설야의 민족의식은 일정하게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냉전적 반제국주의적 인식은 분명 민족의식을 결여한 소련 일변도의 지향과는 차이가 있다. 이 무렵에 북한의 선전분야를 장악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소련파라고 불리워졌던 사람들이다. 해방직후에 당 선전부야를 맡았던 김창만 등이 손을 떼고 그 대신에 박창옥을 비롯한 소련파들이 냉전의 개시와 더불어 이 분야에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소련 중심의 사고를 강하게 내비쳤다. 이들에게는 종전의 소련 중심의 세계파악이 냉전체제의 정착에 따라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우리 민족적 현실을 고려하는 그러한 측면이 결여되었던 것으로 이 시기 한설야가 견지하였던 냉전적 반제국주의 입장과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소련 일변도의 냉전적 세계인식과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이 시기 한설야의 냉전적 반제국주의 인식이 잘 드러나는 글이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의 문학예술(문학예술,1949.8)이다. 이 글은 당시 그의 냉전적 반제국주의가 어떤 것이며 또한 이 논리를 그가 얼마나 내면화하고 있었는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이 글은 19494월 파리에서 열린 제1차 세계 평화 대회에 참여한 후에 쓴 것으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전세계가 양진영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한설야가 참여한 바 있는 파리 세계평화대회는 냉전체제가 굳어진 직후인 19488월 폴란드에서 열린 평화 옹호 문화인 국제대회에서 제기되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동구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이 되어 열렸던 이 회의는 냉전직후 미국과 소련이 각각 동구와 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소련에 가까운 나라의 지식인들이 모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이 제국주의라는 방식으로 다른 나라를 위협하고 나아가 전쟁을 일으킨다고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바로 세계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 위에서 구축된 것이다. 이 대회에서 설치된 국제연락 위원회가 19492월에 소집되어 거기서 같은 해 4월에 파리에서 평화옹호세계대회를 열 것을 결정하였고 세계 각국에 이 대회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호소에 부응하여 북한에서는 평화 옹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전국민족준비위원회 위원 39명을 선거하였고 이 회의의 위원장으로 한설야가 선출되었다. 한설야는 49일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의 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 글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대목은 조국통일에 관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양 진영으로 갈라져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독일과 더불어 세계사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각화된 지역에서의 통일이란 것은 한반도 자신의 문제이자 또한 세계사적 과제라는 것이 당시 한설야의 생각이다. 한설야가 파리를 방문하고 그 회의에 참여한 피카소와 파데예브 등의 유수한 예술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러한 확신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며 나름대로 사명감에 불탔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적 차원의 냉전이 한반도에 통일에 미칠 영향을 민족적 관점에 서서 이해하기보다는 냉전체제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과 싸우는 것이 자신이 그동안 견지해온 민족의식에 더욱 충실한 것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대동강󰡕󰡔역사󰡕이다.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 지하에서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대동강󰡕은 앞서 언급한 냉전적 반제국주의의 시각에 입각해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시선을 더욱 끄는 것은 바로 이 전쟁 무렵에 발표된 장편 󰡔역사󰡕이다. 이 작품은 1951년 하반기부터 착수되어 그 다음해에 연재되었다가 1953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으로서 일제하 항일무장투쟁을 화폭에 담고 있다. 전쟁 시기에 왜 그가 이처럼 항일무장투쟁을 다룬 작품은 이렇게 장편으로 썼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려면 이 시기 그가 가지고 있는 냉전적 반제국주의의식을 때놓고는 불가능하다. 냉전적 반제국주의가 미 소 대립의 한 축인 미국을 제국주의의 정점에 놓고 이들과 맞서 싸우는 일이야말로 바로 민족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과거 일제하에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제하 항일무장투쟁을 다룬 작품을 쓰는 것이 단순히 지난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과제에 나름대로 충실하게 부응하는 길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의 창작과정을 밝히는 글에서 이러한 입장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나는 혁명전통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인민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왜냐면 전쟁 승리를 위해서는 물론 많은 무기들이 요구된다. 그 무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신의 무기다.....우리 인민들의 사상 의식을 혁명가적 기질로 ,승리의 신심으로 ,불요불굴의 인내성으로 ,원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교양할 목적으로 나는 오랫동안 구상해오던 󰡔력사󰡕 창작에 착수하였다. 나는 당시 영용한 인민군대와 함께 충청도 계선까지 종군해 나가면서 인민군대의 영웅적 전투에 대해서 써야 했으며 또는 국제 평화 대회에 참가하여야 했다. 이런 바쁜 가운데 19519월부터 󰡔력사󰡕의 초고를 쓰기 시작하여 다음해 봄부터 󰡔조선문학󰡕에 발표하기 시작하였다.10)

 

한설야의 이러한 인식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은 일제하의 상황과 해방후의 상황이 다르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일제하에 일본에 맞서 싸우면서 해방을 얻는 것은 해방후 이 땅을 분할 점령한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우리 스스로 통일독립을 성취하는 길로 이어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미국과 소련이 엄연히 존재하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체제적 사고에 사로잡혀 한쪽에 기대어 통일을 이룩하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우리 민족의 희생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냉전적 반제국주의 인식이 결국 민족적 불행을 낳을 뿐임을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하여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4. 3세계로서의 자기인식과 민족해방운동의 문학적 해석(1954-1958)

 

참화를 남기고 끝난 전쟁은 냉전적 반제국주의가 그 주관적 의도와 관계없이 얼마나 반민족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남한을 일시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적 우위에 입각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 남한 내의 주민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는 그러한 정치적 산물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전쟁은 남북한 내부에 냉전적 적대감만 한층 강화시켜 양 지역의 내부의 민주화만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평양중심주의에 입각한 냉전적 반제국주의가 통일을 갖다 주기는커녕 오히려 분단만을 고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북한의 지식인이었던 한설야 역시 통감했을 것이며 미 소 대립에 의한 냉전체제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며 또한 냉전적 반제국주의로 대표되었던 민족환원주의적 발상에 대해서도 일정한 반성을 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무렵은 스탈린이 죽은 후 소련 내부에서도 차츰 과거에 대한 비판이 조금씩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국가사회주의 전반에 있어서도 내부 민주화의 기운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할 때이다. 현실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곧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졌던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사상 억압의 강도도 예전 같지 않았다. 특히 1956년에 있었던 소련 당 20차 대회에서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이를 결정적으로 가속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북한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이러한 기회는 한설야로 하여금 세계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좀더 살펴보아야 할 점은 파데예프에 대한 한설야의 입장이다. 파데예프는 1946년부터 소련작가동맹의 위원장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1954년까지 이 조직의 위원장으로 일해 왔다. 스탈린이 죽은 이후 작가동맹 내에서 행정관료자로서의 그의 위치에 대해 심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의 책임과 행정관료로서의 자신의 위치 사이에 갈등하다 1956년에 자살하고 만다. 1949년 이후 평화옹호세계대회와 그 이사회에서 수시로 만나곤 했던 파데예프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을 알고 있었을 한설야에게 파데예프가 겪은 문제가 결코 남의 일로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일과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으로서 자신의 일 사이에 갈등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특히 195610월에 있었던 조선작가동맹 2차 대회는 그러한 고민을 한층 깊게 했을 것이다. 이 대회에서 그가 발표한 보고문을 보면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나올 뿐만 아니라 기존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자유로운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비극적 결말을 보면서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려고 하는 노력과 국가 사회주의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민주화의 바람은 민족적 자율성과 평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설야로 하여금 급속하게 제3세계론에 경도하게 하였다.

 

1955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는 그 결정적 계기였다. 냉전적 세계체제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 비동맹을 외치면서 약소국가의 자율권을 요구한 이 회의는 한설야와 같이 민족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던 그러나 1948년 이후 냉전적 체제의 세계화로 인해 냉전적 반제국주의에 빠져있었던 문학가에게 새로운 길의 모색을 알려주는 신호탄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것은 이 회의에 기초하여 1956년에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시발로 하여 지속적으로 이에 참가하였던 것을 보면 그가 이것에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가 새롭게 보는 것은 바로 냉전적 반제국주의에서 벗어나 민족문제를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대적 국제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였던 해방직후의 민족의식은 급속하게 번진 냉전체제의 영향으로 인하여 본궤도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기존의 냉전적 반제국주의의 시각뿐만 아니라 나아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해서도 동시적으로 반성적 성찰을 하게 된다.

 

3세계로서의 자기인식에 이르면서 작가적 세계에서 일어난 최대의 변화는 단연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재해석이다. 한설야는 과거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재해석에 나서게 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설봉산󰡕의 창작이다. 원래 설봉산은 그 자체로 구상된 것이 아니고 󰡔보천보󰡕란 작품을 쓰기 시작하다가 계획을 바꾸어 그것의 1부로서 󰡔설봉산󰡕을 썼다. 그런데 원래의 3부 구상마저 허물어 버리고 결국 󰡔설봉산󰡕만 남겼다. 그런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왜 그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그린 󰡔보천보󰡕를 쓰려고 하다가 계획을 바꾸어 󰡔설봉산󰡕을 창작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과정에 대한 한설야의 발언은 이 시기 민족문제 인식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재해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사를 제공하다.

 

나는 금년 1월호 󰡔조선문학󰡕에서 금년도의 나의 창작계획으로 󰡔보천보󰡕를 완성할 데 대하여 독자들에게 약속하였다. 그것은 내가 󰡔역사󰡕를 쓸 때부터 계획한 것이요, 또 이 창작에 요구되는 자료도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하였으나 금년 봄에 건강이 좋지 못했던 관계와 장기간의 인도 여행 또는 그 뒤의 불건강 등으로 집필이 계획보다 늦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보󰡕는 이미 상당한 정도 진척되었으나 이 창작 과정에서 나는 창작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보천보󰡕를 쓰기 전에 아니 󰡔보천보󰡕를 좀더 좋은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것을 쓰기 전에 적어도 두 편의 장편을 먼저 내놔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보천보󰡕를 쓰기 전에 조선의 농민 운동에 대해서 써야 할 것을 생각하였으며 그것은 적어도 두편으로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나는 전부 세편의 장편을 새로 계획하게 되었다. 즉 그 제 1편은 1930년 전후부터 조직적혁명적 역량으로 발전한 단천 성진 일대의 농민운동을, 2편은 이 운동의 확대로서 전개된 1933년 이후의 명천 길주를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의 앙양과 김일성 원수 항일무장투쟁 혁명투쟁과의 연결을, 3편은 보천보 진공 전후를 각각 취급할 것을 계획하였다......벌써 20여년 전부터 해왔기 때문에 자료들은 이미 준비 되었고 또 금년에도 새로 수집하였다.11)

 

그가 󰡔보천보󰡕를 쓰려고 했던 것이 󰡔역사󰡕를 쓸 무렵이라고 한 것을 비추어 볼 때 이 작품의 최초 구상은 전쟁 무렵이다. 이 때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설야 자신이 냉전적 반제국주의의 시각에 가두어져 있었던 시점이라 과거 민족해방운동의 해석에 있어 기존의 항일무장투쟁에 가두어져 있었다. 해방직후 그가 혈로를 쓰면서 항일무장투쟁을 다루었던 데에는 억압된 역사의 복원이라 과제가 크게 작용했다면 , 반면 냉전 체제에 편입된 이후에는 이러한 과제가 역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더 크게는 현재의 체제를 변호하는 성격이 다분히 강한 것이었다. 즉 당시 북한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과거의 활동과 현재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반제국주의이며 진정한 식민주의의 극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쓴 것으로 멈추지 않고 항일무장투쟁이 국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보천보 투쟁을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을 중도에 변경해야만 했는데 거기에는 바로 민족해방운동에 재한 재해석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 역사를 좀더 포괄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작가적 인식이 작용하였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만주의 항일운동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이루어졌던 농민운동과 같은 대중 운동도 동시에 보아야만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보천보󰡕를 쓰기 전에 우선 1930년대 초반에 있었던 단천과 성진의 농민운동을 다루고자 했다. 냉전적 반제국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민족문제에 환원시키려는 경향성을 보였다면 이제 농민운동을 다룸으로써 그러한 민족환원주의에서 벗어나 계급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을 통일적으로 보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의 계획을 모두 포기해버리고 󰡔설봉산󰡕만을 내놓았다. 그러나 1931년과 1932년 성진에서의 농민운동을 다룬 󰡔설봉산󰡕의 창작이 한설야의 문학적 노정에서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 일제시대에 1930년대의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을 그린 󰡔황혼󰡕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 점을 생각할 때 그가 1930년대 국내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운동이었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간과할 리 없었을 것이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설봉산󰡕이다. 󰡔황혼󰡕󰡔설봉산󰡕1930년대 국내의 대중운동을 그렸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며 만주의 항일운동과 일정한 차별성을 갖는다.

 

작품의 중간 중간에 만주의 항일운동과 이 성진 지역의 농민운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둘 사이에 질적 차이를 두거나 혹은 위계를 설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작품의 마지막에 경덕이 만주항일운동의 한 성원이 되는 꿈을 가지는 것으로 끝나고 있지만 학철이 여전히 이곳에서 운동을 지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이 두 지역에서의 운동을 수직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그가 힘들여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둘 사이의 유기적 연관 즉 수평적 연관이었지 결코 수직적 관계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은 한설야가 그동안 만주의 항일운동을 자주 그렸던 것이 그것을 우리 역사의 유일한 중심으로 세우려고 하는 일(1959년 이후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67년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된 이후 공고해진 시각)과는 거리가 멀며 단지 그가 강조했던 것은 국내의 운동과 달리 그동안 거의 알려져 기회가 없었던 것을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복원시키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역사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그 바탕으로 깔고 있는 이 작품이 가장 힘들여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일제와 그 주구들이 어떻게 민족해방세력들을 억압하고 탄압하였으며 그 속에서도 이들이 어떻게 난관을 헤치고 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2년간(1931년과 1932년이 중심적 배경이다)에 걸친 농조의 투쟁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 이 소설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은 경덕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농조원을 고발하고 결국은 자살하고 마는 대목이다. 일제와 그 주구들은 민중들의 해방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온갖 비인간적 일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는데 여기서 보는 것처럼 어머니의 모성애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이 사건을 통하여 일제와 그 주구들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을 했는가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를 한 농조원의 어머니가 아들의 석방을 위해 자식의 동료를 밀고하는 이야기를 설정함으로써 평면적인 구성을 벗어나 입체적 구성을 취함으로써 인간의 심층적 내면까지도 보여주고 있는데 성공하고 있다. 농조원의 어머니는 당연히 농조원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한 혁명적 열정으로 충만되어야 할 것처럼 설정하기 쉬우나 여기서는 그렇지 못한 인간의 삶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실의 풍부함을 결코 단순화시키지 않아 이 시기 다른 북한문학에서 보기 힘든 것을 느낄 수 있다.그런 점에서 일제의 일방적인 억압과 이에 맞선 민중들의 일방적인 저항의 대립으로만 과거를 해석하는 소설과 이 소설이 왜 차이를 갖는가 하는 점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특히 이 대목에서 더욱 빛나는 것은 한설야의 독특한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심리 묘사의 핍진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면이 이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후반부 특히 경덕 어머니가 밀고하기까지의 심리적 부대낌을 비롯하여 이에 대해 딸 순덕이 괴로워하면서 대처하는 대목에 이르서는 그의 기량이 십분 발휘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작가는 이처럼 단순한 현실 분석을 넘어 인간 삶의 구체적 양상을 독특하게 그려냄으로써 이 시기 북한문학의 한 성취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이 시기 북한문학의 전반적 분위기 즉 도식주의에 대한 비판이란 측면과 깊은 연관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는 대목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농조원을 밀고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순덕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순덕이 겪는 심리적 갈등에 대한 묘사이다. 작가가 이 대목을 처리하면서 순덕이 별 생각없이 자기 어머니를 원수로 취급하여 버리고 말거나 혹은 어머니라는 이유로 이것을 덮어버리는 것으로 했다면 생활의 진실성을 크게 훼손했을 것이다. 그 대신에 순덕이 한편으로는 어머니라는 이유로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것에 머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어머니를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그린 것은 이전 시기 북한문학에서 유형화되었던 도식주의를 벗어나게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우리 민중의 전통과 근대의 문제이다. 작품 도입부에 나오는 단오날 남자와 여자들이 행하는 씨름과 그네를 비롯하여 작품 중간 중간에 근대 이전의 넉넉하고 충만된 삶과 일제에 의한 근대 이후의 각박한 삶의 대조에 대한 묘사들은 민중적 전통과 근대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가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화를 맞기 전에는 지주들의 등살에 고통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이 점은 경찰서에 잡혀가 안경쟁이 형사로부터 꾀임을 당하는 경덕 어머니가 기차, 공장, 전등 등이 생기어 좋지 않는냐고 확인하는 형사의 말에 지금 생활이 이전의 생활에 비해 결코 나은 것은 없다고 하면서 젊었을 무렵의 전근대의 자기 삶 특히 정월 대보름부터 가을걷이 후의 삶을 돌이켜 보는 대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전근대 시대의 민중 공동체가 가졌던 충만된 삶이 식민지적 근대에 의해서 어떻게 파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의연히 이어져 내려오는 민중적 전통이 어떻게 이 식민지적 근대를 극복하는 데 기여를 할 수 있는가에 착목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점술이라든가 조혼 같은 것은 전통 시대의 민중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던 것이지만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근대 시대에 이르러 버려야 할 것으로 인식하는 대목을 보면 그가 전근대 시대의 민중적 전통 중에서도 취하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 점은 자칫 민속이 갖는 근대극복의 측면을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빚어질 수 있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작가가 단오날 벌이는 씨름과 그네를 묘사한 대목에서 그것들을 단지 농민조합이 일반 농민들을 끌어들이는 계기 정도로 볼 뿐이지 그 이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가 이를 철저하게 육화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일제하 그의 소설인 씨름별반 차이가 없다.

 

󰡔설봉산󰡕의 이러한 지향은 그의 원래 계획대로 이어지기 힘들었다. 1958년 북한 역사학계는 혁명전통의 문제를 다루면서 만주에서의 항일혁명운동과 국내에서의 대중운동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요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국내 대중운동은 어디까지나 항일혁명운동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만주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직된 1932년 말 이후에는 그 어떤 국내의 운동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봉산󰡕의 배경이 되었던 성진에서의 농민운동은 1932년에 한정되기 때문에 그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의 계획에 들어 있던 명천에서의 농민운동은 그러한 당의 역사 해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 빤하기 때문에 이것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의 요구대로 역사를 해석하느니 차라리 이를 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냉전적 반제국주의에서 벗어나 민족적인 것과 계급적인 것의 통일을 추구하려는 한설야의 이 시기 노력 중에서 󰡔설봉산󰡕과 더불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레닌의 초상이란 단편이다. 이 작품은 옥중에서의 두 사람의 만남을 주로 하고 있는데 성순은 만주에서 김일성 유격대의 정치 공작대원으로 일하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이며, 동혁은 러시아에서 온 레닌의 추종자이다. 성순과 동혁은 서로 의견 교환을 하면서 힘을 합하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민족적인 것과 계급적인 것은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일제하 카프 활동을 비롯하여 계급적 대중운동을 해오던 사람들이 계급문제에 치중한 나머지 민족문제를 도외시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비단 계급환원주의에 대해서만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민족문제를 내세운다고 했을 때 자칫 그것이 민족주의적 경사로 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 한설야는 민족적인 것과 계급적인 것의 통일적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당시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면서 자칫 이것이 민족주의운동으로 빠질 것에 대한 경계도 들어 있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한설야는 이 시기에 들어 제3세계로서의 자기인식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냉전적 반제국주의의 국제적 연대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 시기 레닌의 회상기라는 글을 쓸 만큼 레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시 스탈린 체제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모든 사회주의적 노력을 무화시키는 것에 대한 경계의 의미를 또한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한설야는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국가사회주의적 틀에 대한 비판을 행하면서도 사회주의적 노력을 지지하였고 그것과의 연관 속에서 민족적 자율성의 문제라든가 민족해방운동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가 해방직후 가졌던 민주기지론의 평양중심주의의 사고는 여전함을 확인할 수 있다. 냉전적 반제국주의에서는 벗어나서도 냉전체제 이전부터 그가 가졌던 민주기지론은 여전한 것이다. 이는 이 시기에 발표한 길은 하나이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비토착주의적 민족인식과 전일성의 거부(1959-1976)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북한 문학계 내에서는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관심이 한층 가열되었다.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전쟁 직후부터 북한문학계 내에서는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한 비판의 일환으로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었고 한설야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연장선에서 사회주의적 내용에 민족적 형식이란 명제에 대해서도 검토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5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북한문학계 내부에서 열띤 논쟁의 형태를 띠었던 민족적 특성 논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논의가 비평계 내부에서 제기되어 그들 사이에서 논쟁이 오고가면서 그 구체적 작품평의 대상으로 한설야가 창작한 소설 󰡔형제󰡕가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면서 민족적 특성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었을 만큼 이 작품이 갖는 의미는 컸다. 한설야의 󰡔형제󰡕는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시기인 1952년초부터 휴전까지를 배경으로 하여 미국의 공습 속에서도 전쟁 고아를 거두어 친자식처럼 키우는 가야금 연주자요 작곡가인 민족음악인 남진 부부의 삶을 그리고 있다. 식민지 이후에 일본을 통한 서구 근대의 물결 속에서 천대시받았던 가야금에 대해 남다른 집착을 가지고 살아온 남진은 해방후에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펼치면서 민족적인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금옥 5남매를 외삼촌댁에서 데려와 친자식처럼 키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의 부모가 바로 미국에 의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일제와 미국 등의 외세에 의해 잠식당하는 우리의 삶과 문화에 대한 한설야 자신의 애정에 그 기본을 두고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 한설야의 작품에서 이미 강하게 드러났던 것이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한층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민족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족적인 것을 초역사화하지는 않는다. 이 점은 이 작품에서 같은 조선사람이라 하더라도 금옥이 외삼촌과 그의 부인처럼 오히려 외세에 빌붙어 사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속을 위해 조카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학대하는 인물을 등장시킨 데서 잘 알 수 있다. 같은 조선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역사적 환경에 대한 의식적 관계에 따라 달라지게 설정하고 있는 데 이는 그가 조선사람에게 공통되는 어떤 민족성과 같은 것을 아예 고려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민족적인 것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고려하지 결코 초역사화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발표되면서 거의 동시에 벌어진 민족적 특성 논쟁에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당시 이 민족적 특성 논쟁은 크게 세가지의 경향으로 나누어져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기존의 주류적 논리인 사회주의적 내용과 민족적 형식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으로 민족적 특성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민족적 형식 내에서 이해되어야 만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서 벗어나지 않게 된다고 하면서 민족적 형식을 단순한 문학의 형상체계 정도로 보려고 하는 흐름이다. 둘째는 민족적 특성을 형식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내용에도 연관시켜 보지만 민족적 성격이란 것을 설정하여 역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견고하게 존재하는 부분을 초역사적으로 특화시키려고 하는 경향이다. 셋째는 민족적 특성을 그 구체적 역사의 내용 속에서 탐구하면서 특히 민족의식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민족적 성격과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를 설정하지 않는 경향이다.12)

 

당시 논자들은 각각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는 근거로 이 작품을 원용하고 있으나 앞선 두가지의 견해는 󰡔형제󰡕에 대한 바른 해석에 근거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형제󰡕는 세 번째 경향에 맞닿아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한설야는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경직된 이해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또한 토착주의적 경사로부터부터 자신을 구해낼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이 시기 한설야의 문학 󰡔형제󰡕가 갖는 의미는 한층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설야의 󰡔형제󰡕와 더불어 이 시기 문학의 민족적 특성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시조 창작을 들 수 있다. 한설야는 일제시대 이후부터 계속하여 소설을 창작하였고 간혹 희곡을 쓰기도 했으나 이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 그런 점에서 그가 시조를 발표하였다는 사실은 아주 낯선 일이다. 한설야는 1962626일부터 그가 숙청되는 그해 8월 말까지 󰡔문학신문󰡕에 시조를 발표하는데 명기된 창작 연도를 볼 때 19590년부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왜 시조라는 형식을 선택했는가에 대해 밝혀 놓은 글이 없어 그 자세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가 시조를 발표하면서 쓴 작가의 변13)을 볼 때 산문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심회를 이러한 서정적 양식을 통해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서정 양식 중에서 하필 시조를 택했는가 하는 점은 우리가 추측해 볼 수밖에 없는 데 아마도 이 시기에 들어 그가 관심을 두게 된 민족적 특성의 추구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과거에는 시조를 전근대의 지배 계급의 장르라고만 보았는데 여기에서 탈피하여 우리 민족의 정형시의 한 양식으로 충분히 계승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게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하이쿠가 근대 이후에도 그렇게 흥한 것처럼 시조도 충분히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실험했던 것으로 보인다.14)

 

이처럼 비토착주의적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그의 천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극복하지 못하고 마는 것은 역시 해방직후부터 견지했던 민주혁명론의 평양중심주의이다. 이 점은 이 시기에 그가 쓴 장편 󰡔사랑󰡕에서 잘 드러난다. 19607󰡔조선문학󰡕에 발표되기 시작하였다가 1961년에 단행본으로 나온 이 작품은 남한의 현실을 다룬 것으로 전통적인 반미구국투쟁을 다루고 있다. 그 작품의 기본 시각은 민주기지론으로 예전의 이 게열의 작품과 별 차이가 없다. 19604.19가 터지면서 남한 내의 학생운동이 가열되는 것을 보면서 한설야 자신은 역시 민주기지론이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여기에 호응하기 위하여 남한의 대학을 무대로 하여 미국을 반대하는 젊은 학생들의 투쟁을 그렸지만 이전부터 지녔던 민주기지론은 결국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이 시기 한설야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혁명전통의 문제이다. 1950년대 말부터 북한 문학계 내에서는 이른바 혁명전통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물론 이러한 혁명전통의 문제가 비단 문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과거의 역사 특히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해석에서도 제기되었다. 1959년부터 북한에서는 이른바 당의 혁명전통을 수립한다는 차원에서 과거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사에 대한 대대적인 재검토를 시작하였다. 이것의 핵심은 1930년대 국내의 항일대중운동들 특히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국외인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하여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이미 1930년대의 국내의 대중투쟁도 김일성과 그의 동지들이 벌였던 항일무장투쟁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서술이 이루어진 바 있으나 실제 구체적 역사서술에서 이것의 구체적 관련성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이 분리하여 서술하였다.15) 이러한 경향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면서 1930년대 국내의 항일운동은 점차 서술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에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 서술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국내의 투쟁도 이 투쟁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16) 1967년 이후 김일성주의가 들어서기까지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혁명전통의 문제가 단지 역사가들 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당의 선전 분야 책임자들에게서 나온 것인만큼 역사학에 국한된 것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선전 분야의 가장 첨예한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문학 분야에 이 혁명전통의 문제가 제외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1959년 초부터 문학에서의 혁명전통 논의가 펼쳐지기 시작하였다.17)이것이 어느 한 두 평론가의 일이 아니라 당선 전 분야에서 내려온 일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1959821일에는 과학원 어문학연구소에서는 8.15 해방 14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문학의 혁명전통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학술보고회였다. 여기서는 리상태의 항일무장투쟁과정에서의 혁명가요, 연장렬의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의 혁명가요, 현종호의 항일무장투쟁의 영향하에서 발전된 국내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발표되었는데 당시 여러 잡지에서 부분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것을 총화하는 모임의 성격이었다.

 

이러한 논의들은 그 부분적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항일혁명문학을 북한문학의 혁명전통으로 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당시 이 보고에 이어 열린 토론회의 분위기를 전하는 󰡔문학신문󰡕 기자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는 당의 혁명전통과 문학의 혁명전통의 개념문제,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문학과 국내프롤레타리아문학간의 호상관계 문제, 1930년대 혁명문학 연구에서의 현대성 문제와의 결부, 1930년대 혁명문학과 국내 프롤레타리아 문학과의 관계에서 혁신성과 계승성을 명백히 할 문제 등인 바 ,이것이 부족하게 서술되었다는 것이 토론되었다18)

 

기자가 전하는 당시의 토론의 내용을 볼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만주에서의 항일혁명문학과 국내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문학의 혁명전통으로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과정에서 나온 항일혁명문학을 세우려는 시도가 당의 선전부 책임하에 체계적으로 펼쳐지자 이에 대해서 가장 반발한 측은 과거 카프문학을 해왔던 구카프 출신의 문인들이며 그 중에서 가장 앞장을 서서 이에 대해 저항하였던 것이 바로 한설야이다.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이 일에 그가 직접적으로 뛰어든 것은 문학에서의 혁명전통의 문제에 대한 글과 토론회가 성시를 이룬 직후인 1960년이다. 이해 8월 카프 창건일을 기념한 행사에서 한설야는 장문의 평문 카프문학의 빛나는 전통을 발표하였다.19) 만주에서의 항일혁명문학을 혁명전통으로 삼으려고 하는 지향이 단순히 문학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당 선전부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러한 흐름에 동의하지 않는 문학가들도 쉽게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설야가 이처럼 카프문학을 혁명전통으로 규정한 논문을 발표한 데에는 자신을 비롯한 카프 출신의 문학가들이 걸어온 길을 무화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와 함께 갑작스럽게 조직되고 있는 항일혁명문학의 존재에 대한 허구성을 비판하겠다는 생각이 같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반박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것은 항일혁명문학의 존재를 시인하고 이를 전통으로 평가하는 만큼 카프문학도 혁명전통으로 인정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항일무장투쟁 행정에서 개화 발전된 혁명적인 문학예술은 이 시기의 카프 문학예술과 함께 해방전 우리 문학예술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한 것은 바로 그러한 배려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전체적으로 읽을 때 중요한 대목은 바로 카프문학의 혁명적 전통을 주장하는 다음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카프는 조선 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창건되고 발전하였습니다. 카프는 처음부터 조선의 유일하고 대중적인 진보적 반일 문학예술 단체로서 근로대중과 함께 혁명적으로 전진하고 투쟁하였으며 민족적 해방과 근로 대중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며 투쟁하였습니다. 카프의 불요불굴의 전투 정신은 창작에서 공산주의 당성을 구현케 하였으며 이는 우리가 마땅히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전통으로 되고 있습니다.

 

한설야의 주된 관심은 카프문학이 혁명전통이라는 것이고 이는 이후 당 선전부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당 선전부에서는 주춤하기는 했지만 계속하여 이를 관철시키려고 하고 한설야는 이에 대해 계속 반발하였다. 그 양쪽의 갈등이 최고조에 오른 것이 바로 1962년 카프 창건 기념일의 한설야의 보고였다. 투쟁의 문학21)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글에서 한설야는 여전히 같은 주장을 하였다. 당 선전분야에서는 문학분야에서 한설야라는 강적을 만나면서 주춤했기 때문에 다른 분야 역사학분야에서처럼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지는 못하였다. 당시 북한 문학계 내에서 한설야는 조선작가동맹 위원장이었고 1961년 이 조직이 문학예술총동맹으로 바뀌었을 때 역시 이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그가 버티는 한 당의 의도를 쉽게 관철시키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로 가다가 결국 처음에 정하였던 전일적 혁명전통의 수립이란 과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기면서 다른 명분을 걸어 한설야를 숙청시키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62년 한설야의 발표가 나온 직후인 작가동맹 총화회의에서의 그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다.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사의 해석에서는 한설야 스스로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의 확고한 방침과 다른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설봉산󰡕을 쓰고 이후에 원래 계획하였던 연작을 발표하지 않는 용의주도함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학사의 해석에 있어서는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체험한 영것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논의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이 결국에는 당의 입장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이러한 판단과는 정반대였다. 당에서는 방해물이었던 한설야를 배제시키는 쪽으로 결정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설야가 역사의 표면에서 사라지고 마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한설야가 이처럼 카프문학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가 이로 인하여 물러난 사건은 당시 북한 사회 내의 다양성이 소멸되고 전일성이 관철되는 경직성의 문학 분야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한설야의 비극은 곧바로 북한 문학의 비극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6. 바람에 맞선 일생 그리고 식민주의 극복의 과제

 

바람은 어이하여 면바로만 치고오나

등 뒤에 지고가면 걸음도 쉬울 것을

사람도 바람도 서로지려 아니하네

 

한평생을 하루같이 그렁성 살았으니

이제사 돌아서서 바람에게 등을대랴

가던길 나는좋아 한뽄새로 가노라

 

바람도 예이제 한바탕 아니어니

마주온들 차다하랴 차라리 반갑고나

견디여 안고 떨며 가고 또 가리로다

 

인용한 시조는 한설야가 숙청되기 한 달 전에 󰡔문학신문󰡕에 발표한 시조 바람을 안고이다.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감하고 쓴 듯한 느낌을 줄만큼 대단히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 이 무렵을 전후하여 자신의 지향 즉 일제하의 문예전통을 카프로 보려고 하는 것과 당의 정책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긴장을 느꼈으며 단지 이에 굴복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가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정황에서 그는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길대로 그대로 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보여주고 있어 이채롭다. 권력의 압력 속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마음 속으로 승복하지 않을 경우에도 그냥 넘어가곤 했던 것을 생각할 때 한설야의 이러한 태도는 참으로 보기 드문 장면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지점이 한설야를 당시 북한의 그 어떤 지식인과 다르게 만드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김일성이 다시 한설야를 불러 자리를 주려고 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그냥 현재 그대로 살기를 희망했다는 것도 지식인으로서의 한설야의 됨됨이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설야는 해방 후 식민주의의 극복을 이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였다. 민족이라고 하면 곧바로 민족주의를 연상하고 나아가 이는 계급운동 등을 반대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였던 이전의 계급환원주의를 비판함으로써 구각을 탈피하였고 진정한 식민주의의 극복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계급환원론적 시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주변의 정황에 따른 정도와 밀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해방후부터 1962년 숙청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론적으로 심화 확대되었다. 특히 1959󰡔형제󰡕를 발표하면서 북한 문학계 내부에 민족적 특성 논쟁의 도화선을 터뜨렸을 때 그의 이러한 지향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한껏 빛났던 것이다.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의 북한을 비롯하여 많은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비서구의 나라들이 그러하듯이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로 경사하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점은 식민주의의 진정한 극복이기보다는 오히려 서구의 전철을 따라가는 또다른 식민주의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한설야가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민족의식에 대한 나름의 투철한 지향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식민주의의 극복이란 과제에 대해서 나름의 견실한 태도를 가지고 창작에 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민족문학적 관점은 그 주관적 지향과 절절함에도 불구하고 분단현실에 대한 평양중심주의적 인식의 틀을 끝내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제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분단구조가 강제하는 이 평양중심주의는 그 주관적 분단극복의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결국 분단 고착에 이바지하는 역설적 결과를 빚어내게 되는데 한설야가 그 강한 민족현실에 대한 천착에도 불구하고 이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결국 식민주의 극복의 진정한 모습에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분단구조하에서 남북의 중심주의가 갖는 한계를 절감하는 이후 지식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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